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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뮤지컬 영화가 실존 인물의 행적을 얼마나 미화해도 괜찮을까요. 저는 <그레이티스트 쇼맨>을 보면서 'This Is Me' 한 장면에 온몸이 굳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감동이 가라앉고 나서야, 그 무대를 만든 사람에 대한 불편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이 글은 그 두 감정을 솔직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소름 장면 — 문을 밀고 나오는 순간
제가 직접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을 때, 몸이 먼저 반응했던 건 'This Is Me' 장면이었습니다. 바넘이 상류층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단원들에게 뒤에 숨어 있으라고 하는 장면이요. 레티가 문 뒤에 조용히 서 있다가,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계단을 한 칸씩 내려올수록 소리가 커집니다. 뒤에서 단원들이 하나둘 따라 나오고요. 저는 그 순간 소름이 돋았는데, 이유를 한참 뒤에야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숨기라고 한 사람 앞으로, 자기 발로 걸어 나오면서 부르는 노래였으니까요.
특히 닫힌 문을 온몸으로 밀어젖히는 대목에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내면의 변화를 통해 외적 행동으로 나아가는 서사 구조가 이 한 장면에 압축돼 있었습니다. 평생 남의 시선 때문에 방 안에, 집 안에, 무대 뒤에 있어야 했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스스로 앞으로 나서는 장면이었으니까요.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그날의 감정이 그대로 돌아옵니다.
- 레티가 문 뒤에서 조심스럽게 노래를 시작하는 장면
- 계단을 내려오며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구성
- 단원들이 하나둘 따라 나오며 합창으로 이어지는 전개
- 닫힌 문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각적 클라이맥스
실존 논란 — 바넘은 정말 그런 사람이었나
이 영화를 마냥 좋게만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실존 인물 P.T. 바넘을 다루는 방식 때문입니다. 극 중 바넘은 순진한 이상주의자로 그려지지만, 실제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Phineas Taylor Barnum)은 냉철한 흥행 사업가였습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신체적 차이를 가진 사람들을 프릭쇼(freak show), 즉 기이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을 유료로 전시하는 흥행 방식으로 상업화했습니다. 여기서 프릭쇼란 19세기 미국에서 유행한 오락 형식으로, 관객이 돈을 내고 장애인이나 신체적 특이점을 가진 사람들을 구경하는 구조를 말합니다. 그 윤리적 문제는 당시에도 논쟁거리였고, 지금은 더욱 비판적으로 평가받습니다(출처: Britannica, P.T. Barnum).
영화는 사실상 그의 행적만 빌려온 창작 뮤지컬에 가깝습니다. 온 가족이 편하게 즐길 밝은 영화를 만들려다 보니, 역사적 맥락이 가려지거나 포장된 결과가 나왔습니다. 저는 이 지점을 영화 내내 의식했습니다. 스펙터클(spectacle)이라는 개념, 즉 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사람 사이의 권력 구조가 이 영화에서는 완전히 역전되거나 지워져 있었거든요.
영화 안에서 바넘은 실수했다가 반성하고 용서받습니다. 그런데 실제 역사에서 그런 화해가 있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이런 각색이 영화적 허용 범위 안에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판단이 조금 안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존 인물의 이름과 사업을 가져오는 이상, 그 행적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은 따라온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This Is Me — 선언은 아름다웠지만, 누구를 위한 무대였나
이 영화가 가진 힘은 결국 그 선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넘의 서커스에 모인 단원들은 처음에 구경거리로 불려 나온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무대에 서면서 무언가가 달라집니다. 자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처음으로 갖게 됩니다.
그래서 'This Is Me'가 바넘이 아닌 단원들의 노래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바넘이지만, 가장 강한 순간은 그가 없는 자리에서 나옵니다. 숨어 있으라는 사람에게 "우리는 여기 있겠다"고 말하는, 일종의 정체성 선언(identity declaration)이었습니다. 여기서 정체성 선언이란 외부의 시선과 규정에 맞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선언이 결국 그들을 전시했던 사람의 사업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는 구조 안에 있다는 것을요. 영화 문법에서 이를 내러티브 세탁(narrative laundering)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실제로는 문제 있는 구조나 인물이 긍정적으로 인식되도록 만드는 방식입니다. 영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이 영화의 소수자 재현 방식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출처: The Guardian, The Greatest Showman review).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르게 봐야 할 문제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볼 때 두 가지를 분리해서 봤습니다. 무대 위에서 자기 존재를 선언하는 순간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다만 그 무대를 만든 사람을 함께 미화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좋은 노래 한 곡이 한 사람의 실제 행적을 덮어줄 수는 없으니까요.
자주 묻는 질문
Q. 그레이티스트 쇼맨은 실화 기반 영화인가요?
A. 실존 인물 P.T. 바넘의 이름과 서커스 사업을 배경으로 삼았지만, 실화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극적 허구가 대부분이고, 실제 바넘의 행적과는 상당히 다르게 각색된 창작 뮤지컬에 가깝습니다. 이 점을 감안하고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Q. 'This Is Me'가 왜 그렇게 울림이 크다고들 하나요?
A. 무대 위 공연곡이 아니라, 숨어 있으라는 명령에 맞서 스스로 걸어 나오며 부르는 곡이기 때문입니다. 노래가 전달하는 정체성 선언의 맥락이 청각적 감동과 맞물리면서 강한 반응을 불러온다고 봅니다. 저도 그 장면에서 이성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Q. 실제 P.T. 바넘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A. 19세기 미국의 흥행 사업가로, 프릭쇼를 상업화해 큰 수익을 올린 인물입니다. 당시에도 윤리 논란이 있었고, 현재 관점에서는 신체적 차이를 가진 사람들을 착취한 사례로 비판받습니다. 영화 속 순진한 이상주의자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Q. 영화를 비판적으로 본다면 즐기기 어렵나요?
A.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적 시각과 감동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저도 'This Is Me' 장면에서 받은 감동은 진짜였습니다. 다만 그 감동과 영화가 만들어낸 역사적 왜곡을 분리해서 보는 것이 더 정직한 감상법이라고 봅니다.
결론
정리하면, 저는 이 영화를 두 층위에서 봤습니다. 한쪽에는 'This Is Me'가 보여준, 자기 존재를 스스로 선언하는 순간의 힘이 있습니다. 그 장면의 감동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다른 한쪽에는 그 감동이 실제로는 문제적인 역사적 인물을 미화하는 데 소비된다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감동적인 장면 하나가 영화 전체의 윤리적 선택을 덮어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를 처음 보시거나 다시 보실 예정이라면, P.T. 바넘의 실제 행적을 조금만 찾아보고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무대 위의 선언이 더 복잡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만큼 더 솔직한 감상이 될 테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