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대사가 유혹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장면을 보고 나서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은수의 표정은 유혹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 심드렁함이 오히려 이 영화 전체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2001년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는 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 언어로 같은 감정을 말하고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온도차: 두 사람은 처음부터 같은 걸 하지 않았다제가 이 장면을 보고 마음에 걸렸던 건 대사 자체가 아니라 온도차였습니다. 은수가 "라면 먹고 갈래요?"를 던지는 순간, 그 말은 아무 무게도 없이 나옵니다. 큰일 아닌 것처럼. 그런데 상우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 있어요. 저는 그 대조를 보면서 이 두 사람이 지금 다른 영화를 찍고 있다..
사랑을 고백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박찬욱 감독의 을 처음 봤을 때 저는 그 질문 앞에서 한동안 멈췄습니다. 두 사람은 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 영화가 본 작품 중 가장 아프게 남았습니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새겨지는, 그런 이상한 영화였습니다.붕괴 선언 — 형사가 스스로 무너지는 방식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걸린 건 해준이 "저는 완전히 붕괴됐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서래의 알리바이가 조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그가 한 행동이 참 이상합니다. 증거가 될 휴대폰을 바다 깊은 곳에 던지라고 알려주고, 할머니에게는 새 휴대폰까지 사줍니다. 수사 중인 형사가 스스로 증거인멸을 지시한 겁니다.그런데 제가 그 장면에서 충격을..
편견 없는 세상을 꿈꾸는 주인공이 정작 편견을 가장 많이 품고 있었다면,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주토피아를 처음 봤을 때 저는 그 지점에서 꽤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통쾌한 성공담인 줄 알았는데, 보고 나서 제 안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였거든요.사과 장면 — 변명 없는 말이 사람을 움직이는 이유주토피아에서 제 마음이 가장 크게 흔들린 건 액션 장면도, 반전 순간도 아니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실언을 한 주디가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와, 다리 밑에 있는 닉 앞에서 우산을 들고 서서 사과하는 장면이었습니다.그 사과가 좋았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변명이 없었습니다. 몰랐다거나, 그런 뜻이 아니었다거나 하는 말 대신, 자기가 편견에 찬 말로 상처를 줬다는 걸 그대로 인정합니다. 거기서 더 나아..
사랑이 완성돼야만 의미가 있는 걸까요. 1998년 허진호 감독의 는 그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조용히 보여줍니다. 제가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본 건 별 이유 없는 어느 오후였는데, 보고 나서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시한부 영화인 걸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가슴이 눌릴 줄은 몰랐습니다.영정사진을 스스로 찍는다는 것이 영화에서 제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문 장면은 정원이 혼자 자기 영정사진을 찍는 장면이었습니다. 사진관에 혼자 남아 카메라를 세우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셔터를 누릅니다. 그러고는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시 찍습니다.그 장면에서 숨이 턱 막혔습니다. 평생 남의 영정사진을 찍어주던 사람이 자기 걸 찍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더 아팠던 건, 그가 울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영화 (Room, 2015)을 보기 전에 저는 이 영화를 감금과 탈출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고 나서 느낀 건 전혀 달랐습니다. 탈출은 절반도 채 안 되는 이야기였고, 진짜 이야기는 그 이후에 시작됐습니다. 이 글은 그 이후에 대한 기록입니다.탈출 장면이 후련하지 않았던 이유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잭이 카펫에 말린 채 트럭 짐칸에 실려 나가다가 몸을 빼내고, 처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 저는 그 순간 무언가 뻥 뚫리는 느낌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스크린을 보는 내내 숨을 멈추고 있었습니다.잭의 표정이 기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공포에 가까웠습니다. 다섯 해 동안 그 아이가 알던 하늘은 천장에 난 작은 채광창 하나가 전부였는데, 갑자기 사방이 열린 공간에 혼자 놓인 겁니다..
목표를 이루고 나서 오히려 공허해진 경험이 있으신지요. 저는 있습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Soul, 2020)》은 바로 그 감각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영화입니다. 평생 꿈꾸던 무대에 선 재즈 피아니스트 조 가드너가 공연이 끝난 뒤 멍한 얼굴로 걸어나오는 장면에서, 저는 조용히 숨을 삼켰습니다. 그 얼굴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연이 끝난 뒤 찾아오는 공허함 — 조 가드너의 경우일반적으로 꿈을 이루면 행복해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시험만 끝나면, 이것만 되면, 저기만 가면 진짜 삶이 시작될 거라고요. 그런데 제가 직접 그 순간들을 통과해봤더니, 뒤따라오는 감각은 기쁨보다 허탈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습니다.영화 속 조 가드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뉴욕의 전설적인 재즈 뮤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돌아선 적 있으신지요. 저는 그 감각을 정확히 담은 영화를 찾다가 노팅힐을 다시 꺼내 봤습니다. 1999년 개봉 당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가 뭔가 싶었는데, 막상 다시 보니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용기 이야기였습니다. 진심을 말하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그 문제를 가장 정직하게 풀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노팅힐이 특별한 배경 — 왜 하필 이 동네인가노팅힐은 런던 서쪽에 실재하는 동네입니다. 포토벨로 마켓이 있고, 색색의 테라스 하우스가 늘어서 있는 곳이죠. 영화는 그 동네의 낡은 여행 서적 전문점을 주 무대로 삼습니다. 세계적인 배우 애나 스콧이 우연히 그 서점에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저는 처음에 이 설정이 다소 작위적이라고 느..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 영화를 틀었을 때만 해도 그냥 법정 드라마려니 했는데, 법정 변론 장면에서 숨이 멎었습니다. 교과서에서 외웠던 헌법 조문이 저 자리에서는 전혀 다른 무게를 가졌습니다. 같은 문장인데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실감했습니다. 법정 변론, 외웠던 문장이 무기가 된 순간제가 직접 봤는데, 차동영이 증언대에서 "제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판단하는 겁니다"라고 말하는 장면부터 무언가 달라졌습니다. 그 말을 받아치는 송우석의 반문이 이 영화 전체를 뒤흔드는 지점입니다. "증인이 말하는 국가란 대체 뭡니까?"그리고 그가 꺼내는 건 헌법 제1조 2항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헌법 제1조 2항이란 대한민국..
가족끼리 함께 있는데 오히려 더 외로웠던 적이 있습니다. 다들 각자 무너지고 있는데, 아무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는 그런 시간이요. 영화 을 처음 봤을 때 그 감각이 떠올랐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이 낡은 밴 한 대에 올라타서 딸의 미인대회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인데, 웃다가 이상하게 마음이 아픈 영화였습니다.마지막 무대 장면이 저를 무너뜨린 이유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클라이맥스인 미인대회 무대입니다. 올리브가 할아버지가 짜준 안무를 추기 시작하는 순간, 객석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습니다. 심사위원들 표정이 굳고, 진행자가 달려와 아이를 내리라고 하고, 학부모들은 웅성거립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저 어린애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기나 할까 싶어서요.그런..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단순한 공포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닭이 우는 장면 하나가 영화 전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나홍진 감독의 2016년 작 은 지금도 "무명이 선인가 악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리는 영화입니다. 저는 그 논쟁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 즉 종구는 왜 틀린 쪽을 믿었는가에 집중해 이 글을 썼습니다. 닭 울음 — 심장이 가장 세게 뛴 장면제가 직접 극장에서 봤을 때, 이 영화에서 가장 숨이 막혔던 건 귀신이 나오는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무명이 종구를 붙잡고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유는 없었습니다. 설명도 없었습니다. 그냥 기다리라는 말뿐이었죠.화면은 종구의 얼굴과 집 쪽을 계속 오갔습니다. 저는 보면서 속으로 외쳤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