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저는 7살 터울 오빠 하나만 두고 자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레타 거윅 감독의 <작은아씨들>(2019)을 보기 전에 솔직히 걱정이 앞섰습니다. 자매들 사이의 끈끈한 감정을 몸으로 이해한 적 없는 사람이, 이 영화가 담은 자매애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었던 겁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오히려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영화를 더 깊이 파고들게 만들었습니다.

 

자매애가 낯선 사람이 이 영화를 만났을 때

영화를 처음 틀었을 때 제가 느낀 건 묘한 거리감이었습니다. 조와 메그가 서로를 이름 대신 애칭으로 부르는 장면, 말 몇 마디 없이도 눈빛으로 통하는 장면, 한 이불 안에서 소곤소곤 비밀을 나누는 장면들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오빠와 저는 나이 차이가 컸고, 함께 어울려 놀았던 기억보다는 오빠가 이미 다 자란 어른처럼 보였던 기억이 훨씬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영화가 절반쯤 지날 무렵부터 그 낯섦이 슬그머니 다른 감정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는 부러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감정이었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아침 장면이 그랬습니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에도 자매들이 서로를 챙기며 웃는 모습, 그리고 조가 병든 베스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장면에서는 제가 가져본 적 없는 유년의 한 조각을 스크린에서 대신 선물받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레타 거윅 감독은 이 작품에서 비선형 서사(Non-linear Narrative)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비선형 서사란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펼치는 대신,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감정의 대비를 극대화하는 서술 방식입니다. 덕분에 자매들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과 각자의 길을 걷는 성인기가 나란히 배치되면서, 관객은 자매애의 밀도를 더 입체적으로 체감하게 됩니다. 제가 경험해보지 못한 자매 간의 감정을 오히려 더 강하게 느낀 이유 중 하나가 이 구조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약: 자매 경험이 없어도, 오히려 그 결핍이 영화의 자매애를 더 강렬하게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각자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 이게 진짜 자매애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건 자매들 사이의 다름이었습니다. 조는 작가로서의 경제적 독립을 원하고, 메그는 소박한 가정의 행복을 선택하고, 베스는 조용한 헌신 속에서 의미를 찾고, 에이미는 현실적 야망을 숨기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네 사람이 어떻게 갈등 없이 서로를 응원할 수 있는지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보여주는 건, 이들이 갈등이 없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조와 에이미는 실제로 충돌합니다. 서로의 선택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관계가 유지되는 이유는 동일화(Identification)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일화란 상대를 자신의 기준에 맞춰 변화시키려는 심리적 경향을 말하는데, 이 영화의 자매들은 서로를 그렇게 대하지 않습니다. 다름을 없애려 하지 않고, 다름 그 자체를 관계의 조건으로 받아들입니다.

30대에 들어서면서 제 경험상 이 지점이 정말 다르게 읽혔습니다. 저를 포함해 친구들의 인생 방향이 제각각 달라지는 걸 지켜보면서, 누군가의 선택을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다가 관계가 멀어지는 장면들을 꽤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오래가는 관계는 같아지려는 노력이 아니라, 다름을 존중하는 데서 나온다는 걸 영화는 어떤 설교도 없이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실제로 루이자 메이 올컷의 원작 소설은 1868년 출간 당시부터 여성의 자아실현(Self-actualization)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자아실현이란 개인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독립적인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당대 미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결혼과 순종을 기본값으로 요구하던 시대에 출간된 소설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올컷의 의도는 분명했습니다(출처: 미국 의회도서관 Library of Congress).

그레타 거윅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원작에서 다소 억압적으로 읽히던 조의 결혼 서사를 재해석하여, 조가 쓴 소설 속 결말과 현실 속 조의 선택을 의도적으로 분리하는 메타픽션(Metafiction) 구조를 삽입합니다. 메타픽션이란 소설이나 영화 안에서 창작 행위 자체를 소재로 삼아 이야기의 구조를 드러내는 기법을 말합니다. 이 장치 덕분에 관객은 조의 결말을 두 가지 시선으로 동시에 읽을 수 있게 되고, 영화는 단순한 각색을 넘어 독립적인 작품으로 서게 됩니다.

네 자매가 추구한 것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조(Jo): 작가로서의 경제적 독립과 창작적 자아실현. 사회의 기대가 아닌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쓰려 합니다.
  • 메그(Meg): 소박한 가정의 행복. 화려하지 않아도 자신이 선택한 삶이라는 점에서 결코 열등한 선택이 아닙니다.
  • 베스(Beth): 조용한 헌신과 음악. 욕망보다 존재 자체에 충실했던 인물로, 자매들의 정서적 중심축 역할을 합니다.
  • 에이미(Amy): 현실적 야망과 예술적 성취. 허영으로 읽히기 쉽지만, 실제로는 가장 냉철하게 세계를 직시한 인물입니다.
요약: 이 영화의 자매애는 '사이 좋음'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동일화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2019년에 다시 꺼낸 이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말하는 것

그레타 거윅의 <작은아씨들>은 개봉 당시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제작비 4,000만 달러 대비 2억 1,6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뒀고, 아카데미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습니다(출처: 미국 아카데미 공식 사이트). 숫자만 보면 상업적 성공이지만, 제가 직접 영화를 보고 나서 더 주목한 건 이 작품이 왜 지금 시점에 다시 만들어졌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1994년 버전, 1949년 버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작은아씨들>은 시대마다 한 번씩 재소환되는 이야기입니다. 거윅 버전이 이전 각색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여성 서사(Female Narrative)를 다루는 방식에 있습니다. 여성 서사란 여성 주인공의 내면과 선택을 타자의 시선이 아닌 주체의 시선으로 풀어가는 이야기 구조를 말합니다. 거윅은 조를 포함한 네 자매 모두를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가 아닌, 각자의 욕망을 가진 독립적 주체로 그립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베스의 죽음조차 다르게 읽힙니다. 흔히 베스는 희생적 여성상의 전형으로 해석되는데, 저는 거윅이 베스를 그렇게 소비하지 않으려 했다고 봅니다. 베스는 외부의 기대에 맞춰 사는 인물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들을 조용히 사랑하며 살다 간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그 차이가 미세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느껴집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19세기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2020년대를 사는 제 감각과 정확히 맞닿는 지점을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결국 오래가는 이야기는 시대의 옷만 갈아입는 게 아니라, 시대마다 다른 질문에 답하는 구조를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약: 거윅의 각색은 원작의 구조를 빌려 여성 서사를 주체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독립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을 만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원작 소설을 안 읽어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 문제없나요?

A. 전혀 문제없습니다. 오히려 원작을 모르고 보면 비선형 서사 구조의 시간 이동을 더 신선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원작을 읽은 후 다시 보면 거윅이 의도적으로 바꾼 지점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영화가 한 번 더 깊이 읽힙니다.

 

Q. 자매 없이 자란 사람도 이 영화에 공감할 수 있을까요?

A. 제가 직접 그 케이스에 해당하는데, 결론적으로 공감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자매 경험이 없으면 오히려 자매들 사이의 감정이 낯설고 부럽게 느껴지는 방식으로 영화에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경험의 유무보다 감정의 보편성이 더 크게 작동하는 영화입니다.

 

Q. 그레타 거윅 버전이 이전 각색들과 다른 점이 뭔가요?

A. 가장 큰 차이는 메타픽션 구조를 활용해 조의 결혼 서사를 현실과 소설 속 결말로 분리한 점입니다. 이전 각색들이 원작의 결말을 비교적 그대로 따랐다면, 거윅은 조가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쓰는 존재임을 명시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차이 하나가 영화 전체의 온도를 바꿉니다.

 

Q. 에이미 캐릭터가 왜 재평가받고 있나요?

A. 원작에서 에이미는 허영심 많은 막내로 읽히는 경우가 많았지만, 거윅 버전에서는 자신의 예술적 한계를 냉정하게 직시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야망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태도가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자아실현의 형태로 읽히면서, 많은 관객이 에이미에게 다시 공감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

자매 없이 자란 제가 이 영화에서 받은 건 공감이 아니라 그리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어떤 공감보다 오래 남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조가 머리카락을 자르던 장면과 에이미가 유럽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던 장면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을 아직 보지 않은 분이라면, 자매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보시길 권합니다. 자매애를 다룬 영화지만, 결국 말하는 건 어떤 관계에서든 작동하는 것들, 즉 다름을 존중하는 일, 상대의 선택을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는 일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거윅의 <작은아씨들>은 그 이야기를 가장 조용하고 단단하게 전달하는 방식을 알고 있는 영화입니다.

참고: https://blog.naver.com/youngigalchi/2241305078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