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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개봉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스크린에서 실제로 이탈리아 한여름의 열기가 전해지는 것 같아서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 온도가 한참 몸에 남아 있었으니까요.

 

롱테이크와 원작소설 — 두 매체가 그리는 감정의 온도 차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마지막 롱테이크(long take) 장면입니다. 롱테이크란 편집 없이 카메라를 길게 고정한 채 한 장면을 연속으로 담는 촬영 기법을 말합니다. 올리버의 약혼 소식을 전화로 들은 엘리오가 벽난로 앞에 앉아 불꽃을 바라보다 조용히 무너지는 그 장면 — 컷 없이 티모시 샬라메의 얼굴만 한참 담아냅니다. 저는 그 장면이 흘러가는 내내 숨을 참고 있었습니다.

그 위로 수프얀 스티븐스의 가 흐릅니다. 저는 이 OST를 LP로 소장하고 있는데, 바늘을 올려 그 곡을 틀 때마다 자동으로 그 겨울의 방 안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어떤 음악은 기억을 촉발하는 트리거(trigger)가 됩니다. 여기서 트리거란 특정 감각이 과거의 감정 상태를 즉각 재활성화하는 심리적 신호를 의미합니다. 이 영화의 음악은 저에게 정확히 그런 역할을 합니다.

영화를 먼저 본 뒤 원작 소설 <그해, 여름 손님>(안드레 아치먼 著)을 읽었을 때, 저는 두 매체 사이의 온도 차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영화가 햇빛과 침묵으로 감정을 눌러 담는다면, 소설은 엘리오의 내면독백(interior monologue)을 낱낱이 해체해서 보여줍니다. 내면독백이란 인물의 의식 흐름을 그대로 서술하는 문학적 기법으로, 독자를 인물의 머릿속에 직접 데려다 놓는 방식입니다. 그 유명한 복숭아 장면만 해도, 책에서는 훨씬 더 적나라하고 내밀한 언어로 그려져 있어서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른 감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영화가 절제로 승부한다면, 소설은 과잉으로 정직합니다. 어느 쪽이 낫다는 게 아니라, 두 버전을 비교하며 읽고 보는 재미가 컸다는 말입니다. 제 경우엔 감정의 무게를 느끼는 건 영화였고, 그 감정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 건 소설이었습니다.

  • 영화의 롱테이크 — 편집 없이 배우의 얼굴로만 감정을 전달하는 절제된 연출
  • 소설의 내면독백 — 엘리오의 욕망과 혼란을 직접적인 언어로 해부
  • 수프얀 스티븐스 OST — 청각적 트리거로 장면의 감정을 오래 붙잡아두는 장치
  • 복숭아 장면 — 영화는 암시, 소설은 서술로 전혀 다른 온도를 만듦
요약: 영화의 롱테이크와 소설의 내면독백은 같은 사랑을 전혀 다른 감각으로 전달하며, 두 버전을 함께 경험할 때 비로소 이 이야기의 전체 온도가 완성됩니다.

 

아버지 대사와 불균형한 사랑 — 이 영화를 마냥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솔직히 이 영화를 마냥 아름답게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17세 엘리오와 24세 올리버 사이의 나이 차, 그리고 관계가 시작되는 방식이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불편함을 남깁니다. 파워 다이내믹(power dynamic) — 즉 두 사람 사이의 권력 불균형 — 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엘리오의 집에 초대받아 머무는 연장자 올리버는 구조적으로 우위에 있는 위치입니다. 여름 별장, 눈부신 이탈리아 햇살, 지적인 가족이라는 완벽한 배경이 그 불균형을 '낭만'으로 포장하는 건 아닌지, 제가 보면서 내내 의심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카메라는 철저히 엘리오의 시점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올리버가 무엇을 느꼈는지, 왜 결국 떠났는지는 끝까지 흐릿하게 남습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의도적인 서술 전략일 수는 있지만, 그래서 저는 두 사람의 감정이 정말 대등했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극장을 나왔습니다. 일방적인 시선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이라면, 그 아름다움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걸까요.

그런데도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은 건 결국 아버지의 대사였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도려내지 말고 다 끌어안으라"는 그 말 — 퀴어 정체성을 둘러싼 어떤 비판도, 관계의 불균형에 대한 어떤 의심도, 그 한 마디 앞에서는 잠시 힘을 잃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대사는 쉽게 쓰이지 않습니다. 아카데미 각색상 수상작(출처: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이 이 장면을 중심에 두었다는 건, 심사위원들도 같은 지점에서 멈췄다는 뜻이겠죠.

어쩌면 이 영화의 진짜 주제는 첫사랑이 아니라, 상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감정을 차단하지 않고, 그 고통 그대로 살아내라는 것. 퀴어 시네마(Queer Cinema) — 성소수자의 경험과 정체성을 중심에 놓는 영화 장르 — 의 맥락에서도, 이 아버지의 태도는 꽤 오랫동안 드문 장면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로저 에버트 재단이 발행하는 RogerEbert.com에서도 이 영화에 별 4개 만점을 부여하며 "감정의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부자(父子) 장면"이라고 짚었습니다(출처: RogerEbert.com).

요약: 파워 다이내믹과 일방적 시점이라는 불편함을 인정하면서도, 아버지의 대사 하나가 이 영화를 단순한 첫사랑 서사 이상으로 끌어올립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먼저 볼까요, 원작 소설 먼저 읽는 게 나을까요?

A. 저는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었는데, 그 순서가 꽤 좋았습니다. 영화로 장면의 이미지와 음악을 먼저 각인시켜 두면, 소설의 내면독백이 그 위에 겹쳐지면서 훨씬 입체적으로 읽힙니다. 반대로 소설을 먼저 읽으면 영화의 절제된 연출이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떤 순서가 맞는지는 결국 본인의 감상 스타일에 달려 있지 않을까요?

 

Q. 수프얀 스티븐스 OST 중에서 어떤 곡이 가장 유명한가요?

A.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곡은 와 입니다. 특히 은 엔딩 롱테이크 장면과 함께 흘러 많은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저는 LP로 이 앨범을 갖고 있는데, 바늘이 이 트랙에 닿는 순간 엘리오의 얼굴이 자동으로 떠오릅니다. 음악이 장면의 기억을 이토록 오래 붙잡을 수 있다는 게, 이 영화의 가장 큰 힘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Q. 두 사람의 나이 차 때문에 불편하다는 의견도 있던데, 어떻게 봐야 하나요?

A. 불편함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영화를 보면서 그 파워 다이내믹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완벽한 배경이 불균형을 낭만으로 포장하는 게 아닌지 의심하면서 봤으니까요. 그 불편함을 인정한 채로 영화의 다른 층위 — 특히 상실을 대하는 태도,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 를 같이 바라보는 게, 이 작품을 가장 정직하게 감상하는 방법이 아닐까요?

 

Q.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부른다"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요?

A. 영화와 소설에서 엘리오와 올리버는 서로에게 상대방의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달라고 합니다. 자아 융합(ego fusion)의 표현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이는 두 사람이 경계를 허물고 상대방의 존재 안에 자신을 완전히 들여놓고 싶다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이 낯선 방식이 오히려 그들 사이의 감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론

저에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여름의 온도가 그대로 밴 영화입니다. 동시에 그 아름다움 뒤에 있는 불균형과 일방성을 외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두 가지가 모순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게 이 작품의 정직한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대사 한 줄이 모든 논쟁을 잠재웠다고 쓴 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상실을 도려내지 말고 끌어안으라는 그 말이, 저에게는 이 영화 전체를 요약합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먼저 보시고, 이미 보셨다면 원작 소설 <그해, 여름 손님>을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같은 이야기가 전혀 다른 언어로 펼쳐지는 경험, 생각보다 훨씬 가치 있습니다.

참고: https://blog.naver.com/sailerman/2243313234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