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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영화를 다시 보면서 이게 단순한 전쟁 스펙터클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영웅들의 이름은 모두 남았는데, 정작 전쟁이 끝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작품 정보

원제 | Troy

감독 | 볼프강 페테르젠

원작 | 호메로스 『일리아스』

출연 | 브래드 피트, 에릭 바나, 올랜도 블룸, 다이앤 크루거

개봉 | 2004년

볼 수 있는 곳 (2026년 9월 9일 확인)

넷플릭스 — 구독 시청

저는 처음에 극장에서 봤고, 다시 볼 땐 유튜브에서 구매해서 봤습니다. 지금은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네요.

하필 그 밤이었습니다

다시 돌려보다가 멈추게 된 장면이 있습니다. 브리세이스와 아킬레스가 밤을 함께 보내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요. 전장에서만 살아온 남자가 처음으로 죽음 이후를 궁금해하지 않는 얼굴을 하는 순간이었어요. 그 표정 하나 때문에 진심으로 두 사람이 그냥 떠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름 같은 건 남기지 말고, 어디 조용한 데서 살았으면 하고요.

실제로 아킬레스는 그러려고 했습니다. 배를 돌려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으니까요. 전쟁의 명분에 환멸을 느낀 사람이 그 판에서 스스로 내려오려 한 겁니다.

그런데 하필 그 밤이었습니다. 사촌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스의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갔다가 헥토르의 손에 죽어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모든 계획이 무너집니다.

이 타이밍이 너무 잔인하다고 느꼈습니다. 영화 안에 신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데, 저 순간만큼은 누군가 개입한 것처럼 보였거든요. 하필 떠나기로 한 그날 밤이라는 게 우연치고는 너무 정확했습니다.

신전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스 신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들은 대개 신의 개입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원전에서도 아테나, 아폴론, 헤라가 편을 갈라 인간의 전쟁에 직접 끼어들어요. 인간의 고통이 더 큰 뜻의 일부라는 설명을 붙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걸 통째로 들어냈습니다. 아킬레스가 신전에 들어가 동상의 목을 베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브리세이스가 무릎 꿇고 기도해도 신은 오지 않고, 결국 그를 구한 건 신을 모독하던 그 인간이었죠.

여기서 느낀 건 단순한 무신론적 연출이 아니라 훨씬 서늘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없다면 이 모든 죽음에는 뜻이 없습니다. 누구를 벌하기 위한 것도, 누구의 영웅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도 아니에요. 그저 한 사람의 욕심에서 시작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도시 하나가 불탄 것뿐입니다.

승리한 쪽도 건질 게 없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남는 건 승리가 아니라 잔해입니다. 그리스는 이겼고 트로이는 무너졌는데, 그 끝에 무엇이 남았는지 짚어보면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헥토르도, 파트로클로스도, 아킬레스도 죽었습니다. 아가멤논은 이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데 함락된 성 안에서 브리세이스의 손에 죽고요. 헬레네를 되찾겠다는 명분으로 시작했지만 그가 실제로 원한 건 트로이라는 도시였고, 그 도시도 그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전통적인 전쟁 영화라면 이 자리를 승리의 장면으로 채웁니다. 그런데 트로이는 폐허만 남겨놔요. 살아남은 사람들이 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저는 후련함 대신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파리스의 화살이 아킬레스의 발뒤꿈치에 박히는 장면에서는 정말 슬펐어요. 그렇게 강했던 사람이 결국 그렇게 가는구나 싶어서요.

그가 브리세이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제 평화롭게 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웅의 마지막 말이 승리도 복수도 명예도 아니라 평화였다는 게 오래 남았습니다. 저 사람이 원했던 건 결국 승리가 아니었던 거예요.

아킬레스의 비극은 흔히 분노로 분석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의 진짜 비극이 타이밍이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요. 떠나려던 그날 밤 파트로클로스가 죽지 않았더라면, 저 두 사람은 정말 그냥 살 수 있었을 테니까요.

다음에 볼 영화, 오디세이

트로이를 다시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작품이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예요. 2026년 8월 국내 개봉했고 상영 시간은 172분입니다. 저도 최근에 극장에서 봤는데 재밌게 봤어요.

이 둘은 비슷한 소재가 아니라 실제로 앞뒤가 이어집니다. 트로이에서 목마 계략을 낸 인물이 오디세우스잖아요. 그가 전쟁을 끝낸 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 10년간 겪는 여정이 오디세이의 이야기입니다. 트로이가 전쟁의 이야기라면 오디세이는 그 전쟁이 끝난 자리에서 시작하는 셈이죠.

원작도 짝을 이룹니다. 트로이는 『일리아스』를, 오디세이는 같은 작가의 『오디세이아』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맷 데이먼이 오디세우스를, 앤 해서웨이가 페넬로페를, 톰 홀랜드가 아들 텔레마코스를 맡았습니다. 상업 영화 최초로 모든 장면을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만 촬영한 작품이라 화면 자체가 화제가 됐고요.

두 편을 이어서 보고 나니 그리스로마신화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어릴 때 읽었던 거랑 지금 읽는 게 또 다를 것 같아서요.

자주 묻는 질문

Q. 원작 일리아스와 많이 다른가요?
A. 가장 큰 차이는 신의 유무입니다. 원전에서는 올림포스 신들이 직접 개입하는데 영화에는 한 번도 안 나와요. 이 선택 하나가 온도를 완전히 바꿉니다.

Q. 파트로클로스는 왜 아킬레스 갑옷을 입었나요?
A. 사기가 꺾인 그리스군을 일으키려고요. 적군이 아킬레스로 오인하면 혼란에 빠질 거라 생각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