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을 나서면서도 한동안 걸음이 떼지지 않았던 영화가 몇 편이나 될까요. 저는 손에 꼽히는 그 목록 맨 앞에 봉준호 감독의 (2003)을 올려둡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이 영화는 범인을 쫓는 이야기보다 훨씬 더 묵직한 것을 남겼습니다. 그날 집에 가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습니다.시대적 맥락 —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구조의 실패였습니다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저는 박두만이라는 형사에게 분노했습니다. 눈만 보면 범인을 안다고 믿고, 자백은 발로 받아내는 사람. 그런데 여러 번 다시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그 무능이 사실은 한 개인의 게으름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사건 현장에 경운기가 들어와 발자국을 죄다 뭉개버립니다. 지원을 요청해도 병력은 데모 진압에 나가 있어요. 피..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비영어권 영화 최초로 작품상을 수상한 기생충은, 상영 시간 132분 내내 단 한 줄의 설명 대사 없이 계급을 시각화한 영화입니다. 저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대사보다 계단과 빗소리가 훨씬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계단 상징 — 두 세계를 가르는 거리기생충에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장면은 폭우가 쏟아지던 밤, 기택 가족이 박 사장네 집을 빠져나와 끝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시퀀스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가족은 그 집 거실에 누워 마치 자기들 공간인 양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예정에 없던 주인의 귀가로 순식간에 테이블 밑에 숨어야 하는 처지가 됐습니다.집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하강이 정말 길었습니다.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