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영화를 볼 때까지 퀸의 음악을 그냥 "아는 노래"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1985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 장면을 유튜브에서 보는 공연이 시작되고 자세를 고쳐 앉았어요. 이어폰을 뽑고 스피커로 바꿨고, 저도 모르게 볼륨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라이브 에이드 장면, 모니터 앞에서 소름이 돋았습니다라이브 에이드란 1985년 7월 13일, 아프리카 기아 구호를 위해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과 미국 JFK 스타디움에서 동시에 열린 대규모 자선 공연입니다. 전 세계 약 19억 명이 위성 중계로 지켜봤다고 알려져 있으며, 퀸의 21분 세트는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로 지금도 회자됩니다.영화에서 프레디 머큐리가 피아노 앞에 앉기 전에 관중을 한번 쓱 훑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가..
열 살짜리 아이가 우주비행사 헬멧을 벗고 현관을 나서는 장면. 저는 그 몇 초를 보면서 이상하게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영화 〈원더〉는 트리처콜린스 증후군(Treacher Collins Syndrome)을 가진 소년 어기 풀먼이 처음으로 공립학교에 입학하는 이야기인데, 이 영화가 단순히 "장애를 가진 아이가 학교에서 살아남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다 보고 나서 그 판단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첫 등굣길, 헬멧을 벗는다는 것의 무게어기가 늘 쓰고 다니던 우주비행사 헬멧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봤을 때, 그 헬멧이 그 애가 세상과 자기 사이에 세워둔 유일한 벽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그걸 스스로 내려놓고 문을 열고 나가는 열 살짜리를 보면서, 저 ..
하이틴 영화라고 하면 가볍게 넘어가기 쉽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월플라워」(The Perks of Being a Wallflower, 2012)를 보다가 터널 장면 하나에서 멈췄습니다. 샘이 트럭 짐칸 위로 올라가 두 팔을 벌리는 그 순간, 찰리는 차 안에서 부러운 얼굴로 그걸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저는 그 표정이 너무 낯익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딱 저 자리에 있었거든요. 터널 장면이 말하는 것 — 찰리의 성장「월플라워」는 스스로를 벽에 붙은 꽃(wallflower)이라 표현하는 내성적인 고등학생 찰리의 이야기입니다. 월플라워(wallflower)란 파티나 모임에서 구석에 서서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영어 표현으로, 사회적으로 고립된 개인의 심리 상태를 함축합니다. 찰리는 그..
에어컨 바람 속에서 화면 속 이치코가 한여름 장작 스토브 앞에 쪼그리고 앉아 땀을 흘리는 장면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리모컨을 내려놓았습니다. 리틀 포레스트는 한국판과 일본판 모두 '도시를 떠난 귀농'을 다루지만, 두 영화가 풍기는 공기의 온도는 전혀 다릅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 차이를 알고 보느냐 모르고 보느냐에 따라 감상이 꽤 많이 갈렸습니다. 계절의 속도 — 이치코가 빵을 굽는 이유저는 그날 에어컨을 켜놓고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를 봤습니다. 화면 속 이치코는 한여름 땡볕 아래 장작 스토브에 불을 피우고 있었어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땀이 목덜미로 흐르는데도, 반죽을 앉혀놓고 장작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불 온도를 손으로 맞추더군요.솔직히 처음엔 이해가 안 갔습니다. 저 더위에 왜 굳이 불을 피..
1988년 개봉한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은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과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동시에 거머쥔 작품입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영화가 끝나고 꽤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단순한 향수 영화가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뒤로하고 떠나야만 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이 영화는 어떤 판본을 보느냐에 따라 인상이 꽤 달라집니다. 국내에 널리 알려진 건 124분 국제판이고, 감독판은 173분입니다. 감독판에는 성인이 된 토토가 엘레나와 재회하는 긴 대목이 들어있는데, 이 부분이 있고 없고에 따라 알프레도의 선택이 완전히 다르게 읽힙니다. 저는 국제판을 보고 한참 뒤에 감독판을 봤는데, 솔직히 국제판 쪽의 여운이 더 오래 갔습니다. 처음 보신다면 국제판을, 이미 ..
AI와 나눈 대화가 하루 중 가장 편한 시간이 되어버린 적 있으신 분이라면, 영화 가 단순한 SF로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저도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땐 그냥 감성적인 미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고 나서야 이게 얼마나 지금 이야기인지 실감했습니다. 2013년 개봉작이 2020년대를 이렇게 정확히 짚어낼 줄은 몰랐습니다. AI 연애가 가능하다고 느끼는 이유AI와 대화해본 적이 있다면 한 번쯤 이런 감각을 경험해봤을 겁니다. 상대가 절대 화를 내지 않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딱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말을 건네는 느낌. 저도 처음에는 "그냥 프로그램이잖아"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대화를 기다리는 저를 발견했습니다.영화 속 테오도르도 처음엔 그런 식으로 시작합니다. 감성형 AI OS인..
첫사랑 영화가 오래 남는 건 아름다워서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제가 건축학개론을 다시 꺼내 볼 때마다 느끼는 건 아름다움보다 민망함 쪽에 가깝습니다. 그 시절 제 모습이 승민과 너무 닮아 있어서요. 마음이 있으면서도 표현할 줄 몰라 괜히 무뚝뚝하게 굴고, 사소한 오해 하나에 혼자 등을 돌리던 그 서툶 말입니다. 2012년 개봉 후 10년이 넘도록 이 영화가 계속 회자되는 이유가 단순히 첫사랑 코드 때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첫사랑 감성과 90년대 시대상 — 이 영화가 정확하게 붙잡은 것들건축학개론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승민과 서연이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에 몰래 들어가, 낡은 마루에 나란히 누워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음악을 듣는 장면입니다. 전람회의 이 흘러나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
톰은 썸머를 사랑한 게 아니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오래 믿어온 '운명적 사랑'이라는 개념을 썸머라는 사람 위에 덮어씌웠다. 저는 이 영화를 여름마다 다시 꺼내 보는데, 볼 때마다 그 사실이 더 선명하게 보여서 유쾌하면서도 조금 씁쓸해집니다. 매년 여름마다 다시 꺼내 보게 되는 영화500일의 썸머는 제목에 계절이 박혀 있어서인지, 여름이 오면 자연스럽게 손이 갑니다. 의도하고 찾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는 영화입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런 영화는 흔하지 않습니다. 계절이 트리거가 되는 작품이요.2009년 개봉한 이 영화는 마크 웹 감독이 연출하고 조셉 고든-레빗과 주이 디샤넬이 주연을 맡았습니다. 비선형적 서사 구조, 그러니까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흐르지 않고..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비영어권 영화 최초로 작품상을 수상한 기생충은, 상영 시간 132분 내내 단 한 줄의 설명 대사 없이 계급을 시각화한 영화입니다. 저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대사보다 계단과 빗소리가 훨씬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계단 상징 — 두 세계를 가르는 거리기생충에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장면은 폭우가 쏟아지던 밤, 기택 가족이 박 사장네 집을 빠져나와 끝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시퀀스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가족은 그 집 거실에 누워 마치 자기들 공간인 양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예정에 없던 주인의 귀가로 순식간에 테이블 밑에 숨어야 하는 처지가 됐습니다.집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하강이 정말 길었습니다.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가..
1989년작 《죽은 시인의 사회》는 개봉 35년이 지난 지금도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단 세 글자로 불리는 영화입니다. 처음 봤을 때 저는 그 말을 그냥 낭만적인 구호로 흘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닐의 마지막 무대를 다시 보고 나서야, 그 문장이 얼마나 절박한 외침이었는지 알게 됐습니다. 카르페 디엠, 낭만이 아닌 절박함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에서 나온 라틴어 구절입니다. 여기서 카르페 디엠이란 "현재의 순간을 붙잡으라"는 뜻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내려두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자유롭고 즉흥적인 삶을 예찬하는 구호처럼 알려져 있는데, 저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실제로 그렇게만 받아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