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두 번 이상 보면 처음엔 놓쳤던 장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저도 처음엔 택시운전사를 '5·18을 배경으로 한 감동 영화' 정도로만 봤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 다시 봤을 때, 검문소 장면에서 또 눈물이 났고, 그제야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각자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을 한 사람들의 기록이라는 것.검문소 장면: 대사 없는 선택이 남긴 것극적인 결단의 순간이라면 보통 음악이 깔리고, 대사가 나오고, 카메라가 인물의 얼굴을 천천히 잡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오랫동안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면서 깨달은 건, 가장 묵직한 장면일수록 오히려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만섭의 택시가 검문에 걸리는 장..
저는 아이언맨 1편을 극장에서 봤을 때 마지막 30초 때문에 한동안 멍했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서 대본을 집어던지는 그 작은 동작 하나가 액션 장면 전부보다 오래 남았거든요. 이 영화가 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출발점으로 불리는지, 저는 그 순간에 답이 다 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정체 공개 — 히어로 장르의 문법을 깨버린 마지막 30초히어로 영화에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이중 정체성(Dual Identity), 쉽게 말해 가면 뒤에 진짜 얼굴을 숨기는 것이 이 장르의 가장 오래된 서사 문법입니다.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을 숨기고, 스파이더맨은 피터 파커를 감춥니다. 저도 히어로 영화를 볼 때면 늘 "저 사람 정체가 언제 들킬까"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쪽이었습니다. 그게 당연한 긴장감이라고 여겼으..
영화를 끝까지 보고도 주인공이 진짜로 미쳤는지 안 미쳤는지 모르겠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처음 봤을 때 그 쪽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대사 한 줄이 전부를 바꿔놨어요. 괴물로 살 것인가, 선량한 사람으로 죽을 것인가. 그 질문이 멧 번이고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진짜 미친 건지, 알면서 모르는 척한 건지영화를 다 봤는데 주인공이 실제로 정신질환자였는지 아닌지가 명확하지 않다고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다시 보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앤드루 레디스가 마지막 장면에서 정신이 돌아온 게 아니라,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쪽으로 읽혔거든요.이 해석의 근거가 되는 개념이 바로 '해리성 정체감 장애(DID)'입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란 극심한 심리적 외상(트라우마)으로 인해 하나의..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복수극이라고 생각하며 봤습니다. 누가 가뒀는지 찾아내서 갚아주는 이야기라고요. 그런데 펜트하우스 장면에서 앨범이 펼쳐지는 순간, 제가 두 시간 가까이 따라온 이야기의 구조가 통째로 무너졌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던 건,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런 걸 봐도 되나 싶은 마음과 눈을 못 떼겠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펜트하우스 반전, 그리고 말의 무게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출처: 칸 영화제 공식 사이트). 수상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쿠엔틴 타란티노가 강하게 밀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자주 인용됩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장르 스릴러로 분류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수, 근친, 기억의 ..
픽사 애니메이션 「업(Up, 2009)」의 오프닝 시퀀스는 대사 한 마디 없이 약 4분 만에 한 부부의 일생을 통째로 담아냅니다. 처음 봤을 때 저는 영화가 시작한 지 십 분도 안 됐는데 이미 울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볼 때도 마찬가지였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세번째 볼 때는 일부러 소리를 끄고 오프닝만 다시 돌려봤습니다. 마이클 지아치노의 음악이 이 시퀀스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거든요. 결과는 예상과 조금 달랐습니다. 음악이 없어도 여전히 목이 메었습니다. 병원 복도의 파란 조명, 엘리가 앉아있던 의자의 높이. 칼이 넥타이를 매만지는 손. 이미지만으로 이미 다 말하고 있었습니다. 음악은 감정을 만들어낸게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감정에 손을 얹고 있었을 뿐이더군요...
극장을 나오면서 한동안 걷지 못했습니다. 정의가 왜 늘 누군가 죽고 난 다음에야 움직이기 시작하는지, 그 값을 왜 항상 가장 어린 사람들이 치르는지. 영화 은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해 6월 항쟁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다룹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낯섦이었습니다. 영웅 한 명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연쇄가 역사를 만들었다는 것, 그 구조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았습니다. 역사적 맥락: 1987년 그 겨울이 품고 있던 것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 사망했습니다. 당시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말로 사건을 덮으려 했습니다. 이른바 '탁 치니 억'으..
영화관을 나서면서도 한동안 걸음이 떼지지 않았던 영화가 몇 편이나 될까요. 저는 손에 꼽히는 그 목록 맨 앞에 봉준호 감독의 (2003)을 올려둡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이 영화는 범인을 쫓는 이야기보다 훨씬 더 묵직한 것을 남겼습니다. 그날 집에 가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습니다.시대적 맥락 —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구조의 실패였습니다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저는 박두만이라는 형사에게 분노했습니다. 눈만 보면 범인을 안다고 믿고, 자백은 발로 받아내는 사람. 그런데 여러 번 다시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그 무능이 사실은 한 개인의 게으름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사건 현장에 경운기가 들어와 발자국을 죄다 뭉개버립니다. 지원을 요청해도 병력은 데모 진압에 나가 있어요. 피..
히어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환호 대신 사이렌 소리를 뒤로하고 어둠 속으로 달아난다면, 그게 과연 승리일까요.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2008)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이 질문을 한참 붙들고 있었습니다. 정의를 지켰는데 이름은 범죄자가 되는 결말. 그 씁쓸함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관람 환경에 따라 체감이 꽤 달라집니다. 놀란 감독이 오프닝 은행 강도 장면과 홍콩 시퀀스 등 여러 장면을 IMAX 필름 카메라로 찍었기 때문입니다. IMAX 상영본에서는 그 구간만 화면 위아래가 확 열리면서 시야를 덮습니다. 저는 재개봉 IMAX 상영관에서 다시 봤는데, 조커가 은행에서 걸어나오는 장면의 압박감이 집에서 볼 때와 비교가 안됐습니다. 화면비율이 바뀌는 순간 관객의 호흡도 같..
솔직히 저는 레미제라블을 그냥 유명한 뮤지컬 영화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2012년 톰 후퍼 감독 작품이고,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했다는 것도 나중에 찾아봤을 정도예요. 막상 보고 나서야, 이게 단순히 잘 만든 뮤지컬 영화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판틴이 머리를 자르는 장면에서 저는 화면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립싱크 없이 찍은 현장 녹음, 그게 그 눈물의 정체였습니다일반적으로 뮤지컬 영화는 미리 녹음된 음원에 맞춰 배우가 립싱크(lip sync)를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립싱크란 사전 녹음된 음악을 틀어놓고 배우가 입 모양만 맞추는 방식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뮤지컬 영화가 이 방식을 택하는 이유는 음질 안정성과 연기의 완성도를..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관에서 이렇게 소리 내서 웃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극한직업은 2019년 개봉 당시 누적 관객 1,626만 명을 기록하며 역대 한국 영화 흥행 2위에 오른 작품입니다. 근데 제가 실제로 보고 나서 느낀 건, 이 영화가 단순히 "웃긴 영화"가 아니라는 거였습니다. 웃음 뒤에 꽤 묵직한 무언가가 깔려 있었거든요.수원왕갈비통닭 장면이 왜 그렇게 웃겼나제가 제일 크게 웃었던 건 무전기 장면이었습니다. 영호가 밖에서 잠복 중에 이무배 일당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다급하게 무전을 치는데, 아무도 받질 않아요. 이유가 뭐냐면, 팀원들이 전부 가게 안에서 닭 튀기느라 무전기를 꺼놨거든요. 전화도 안 받고, 잠복수사 중이라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 겁니다.그 장면에서 극장 전체가 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