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대사가 유혹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장면을 보고 나서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은수의 표정은 유혹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 심드렁함이 오히려 이 영화 전체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2001년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는 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 언어로 같은 감정을 말하고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온도차: 두 사람은 처음부터 같은 걸 하지 않았다제가 이 장면을 보고 마음에 걸렸던 건 대사 자체가 아니라 온도차였습니다. 은수가 "라면 먹고 갈래요?"를 던지는 순간, 그 말은 아무 무게도 없이 나옵니다. 큰일 아닌 것처럼. 그런데 상우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 있어요. 저는 그 대조를 보면서 이 두 사람이 지금 다른 영화를 찍고 있다..
사랑을 고백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박찬욱 감독의 을 처음 봤을 때 저는 그 질문 앞에서 한동안 멈췄습니다. 두 사람은 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 영화가 본 작품 중 가장 아프게 남았습니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새겨지는, 그런 이상한 영화였습니다.붕괴 선언 — 형사가 스스로 무너지는 방식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걸린 건 해준이 "저는 완전히 붕괴됐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서래의 알리바이가 조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그가 한 행동이 참 이상합니다. 증거가 될 휴대폰을 바다 깊은 곳에 던지라고 알려주고, 할머니에게는 새 휴대폰까지 사줍니다. 수사 중인 형사가 스스로 증거인멸을 지시한 겁니다.그런데 제가 그 장면에서 충격을..
목표를 이루고 나서 오히려 공허해진 경험이 있으신지요. 저는 있습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Soul, 2020)》은 바로 그 감각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영화입니다. 평생 꿈꾸던 무대에 선 재즈 피아니스트 조 가드너가 공연이 끝난 뒤 멍한 얼굴로 걸어나오는 장면에서, 저는 조용히 숨을 삼켰습니다. 그 얼굴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연이 끝난 뒤 찾아오는 공허함 — 조 가드너의 경우일반적으로 꿈을 이루면 행복해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시험만 끝나면, 이것만 되면, 저기만 가면 진짜 삶이 시작될 거라고요. 그런데 제가 직접 그 순간들을 통과해봤더니, 뒤따라오는 감각은 기쁨보다 허탈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습니다.영화 속 조 가드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뉴욕의 전설적인 재즈 뮤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돌아선 적 있으신지요. 저는 그 감각을 정확히 담은 영화를 찾다가 노팅힐을 다시 꺼내 봤습니다. 1999년 개봉 당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가 뭔가 싶었는데, 막상 다시 보니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용기 이야기였습니다. 진심을 말하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그 문제를 가장 정직하게 풀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노팅힐이 특별한 배경 — 왜 하필 이 동네인가노팅힐은 런던 서쪽에 실재하는 동네입니다. 포토벨로 마켓이 있고, 색색의 테라스 하우스가 늘어서 있는 곳이죠. 영화는 그 동네의 낡은 여행 서적 전문점을 주 무대로 삼습니다. 세계적인 배우 애나 스콧이 우연히 그 서점에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저는 처음에 이 설정이 다소 작위적이라고 느..
가족끼리 함께 있는데 오히려 더 외로웠던 적이 있습니다. 다들 각자 무너지고 있는데, 아무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는 그런 시간이요. 영화 을 처음 봤을 때 그 감각이 떠올랐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이 낡은 밴 한 대에 올라타서 딸의 미인대회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인데, 웃다가 이상하게 마음이 아픈 영화였습니다.마지막 무대 장면이 저를 무너뜨린 이유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클라이맥스인 미인대회 무대입니다. 올리브가 할아버지가 짜준 안무를 추기 시작하는 순간, 객석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습니다. 심사위원들 표정이 굳고, 진행자가 달려와 아이를 내리라고 하고, 학부모들은 웅성거립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저 어린애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기나 할까 싶어서요.그런..
지금 사는 시대가 유독 시시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오래된 영화나 음악에 손이 갔는데, 어느 순간 그게 도피인지 취향인지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디 앨런의 2011년작 《미드나잇 인 파리》는 그 질문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과거를 동경하는 것이 낭만인지 회피인지, 이 영화는 웃기면서도 꽤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헤밍웨이가 읽기를 거절한 이유 — 황금시대의 환상이 작동하는 방식파티에서 누군가를 소개받았는데 그게 어니스트 헤밍웨이라면 어떤 표정이 될까요. 주인공 길(오웬 윌슨)이 딱 그 상황을 맞닥뜨립니다. 제가 그 장면을 처음 봤을 때 길의 얼떨떨한 표정이 정확히 제 표정이었습니다. 책으로만 알던 대문호가 눈앞에 서 있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웃기는데, 그 다음 대사에서 소리..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인도 뮤지컬 영화는 다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시간짜리라는 말에 미루고 또 미뤘죠.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는, 마지막 반전 장면에서 "어?" 소리를 입 밖으로 냈습니다. 란초가 누구인지 끝까지 의심하지 않았던 제가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순간이었습니다.반전 구조: 란초의 정체와 이 영화가 숨긴 것파르한과 라주가 5년 만에 란초를 찾아 긴 여정을 떠납니다. 주소를 어렵게 알아내서 도착했더니, 장례식이 열리고 있었죠.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는데 돌아본 얼굴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화면을 멈추고 다시 되감았습니다. 제가 영화 내내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이름이, 사실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받아들이게 됐습니다.일반적으로 인도 상업영화..
11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의 생사조차 몰랐던 세 사람이, 아무런 약속도 없이 같은 공원에 모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숨을 참았습니다. 영화 의 라스트신은 그냥 감동적인 결말이 아니라, 영화가 처음부터 쌓아온 논리의 완성이었습니다. 말이 없어도 전부 전달된 라스트신일반적으로 감동적인 재회 장면에는 대사가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봤을 때, 대사가 한 마디도 없는 그 몇 초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전달했습니다.어거스트가 무대에 올라 자신이 작곡한 곡을 지휘하기 시작하면, 카메라는 관객석으로 넘어갑니다. 라일라가 음악에 이끌려 걸어 들어오고, 반대편에서 루이스가 걸어 들어옵니다. 두 사람 다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그 소리가 왜 이렇게 마음을 흔드는지 모..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2004년 개봉한 영화 를 다시 보면서, 저는 이게 단순한 전쟁 스펙터클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영웅들의 이름은 모두 남았는데, 정작 전쟁이 끝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이 글은 그 '아무것도 없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브리세이스와 아킬레스, 그 한 장면이 남긴 것제가 직접 이 영화를 다시 돌려봤는데, 멈추게 된 장면이 있었습니다. 브리세이스와 아킬레스가 밤을 함께 보내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습니다. 전장에서만 살아온 남자가 처음으로 죽음 이후를 궁금해하지 않는 얼굴을 하는 순간이었어요. 저는 그 표정 하나 때문에 진심으로 두 사람이 그냥 떠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름 같은 건 남기지 말고, 어디 조용한 데서 살았으면 하고요.실제로 아킬레스..
감동적인 뮤지컬 영화가 실존 인물의 행적을 얼마나 미화해도 괜찮을까요. 저는 을 보면서 'This Is Me' 한 장면에 온몸이 굳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감동이 가라앉고 나서야, 그 무대를 만든 사람에 대한 불편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이 글은 그 두 감정을 솔직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소름 장면 — 문을 밀고 나오는 순간제가 직접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을 때, 몸이 먼저 반응했던 건 'This Is Me' 장면이었습니다. 바넘이 상류층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단원들에게 뒤에 숨어 있으라고 하는 장면이요. 레티가 문 뒤에 조용히 서 있다가,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합니다.그런데 계단을 한 칸씩 내려올수록 소리가 커집니다. 뒤에서 단원들이 하나둘 따라 나오고요. 저는 그 순간 소름이 돋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