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짜리 아이가 우주비행사 헬멧을 벗고 현관을 나서는 장면. 저는 그 몇 초를 보면서 이상하게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영화 〈원더〉는 트리처콜린스 증후군(Treacher Collins Syndrome)을 가진 소년 어기 풀먼이 처음으로 공립학교에 입학하는 이야기인데, 이 영화가 단순히 "장애를 가진 아이가 학교에서 살아남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다 보고 나서 그 판단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첫 등굣길, 헬멧을 벗는다는 것의 무게어기가 늘 쓰고 다니던 우주비행사 헬멧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봤을 때, 그 헬멧이 그 애가 세상과 자기 사이에 세워둔 유일한 벽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그걸 스스로 내려놓고 문을 열고 나가는 열 살짜리를 보면서, 저 ..
톰은 썸머를 사랑한 게 아니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오래 믿어온 '운명적 사랑'이라는 개념을 썸머라는 사람 위에 덮어씌웠다. 저는 이 영화를 여름마다 다시 꺼내 보는데, 볼 때마다 그 사실이 더 선명하게 보여서 유쾌하면서도 조금 씁쓸해집니다. 매년 여름마다 다시 꺼내 보게 되는 영화500일의 썸머는 제목에 계절이 박혀 있어서인지, 여름이 오면 자연스럽게 손이 갑니다. 의도하고 찾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는 영화입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런 영화는 흔하지 않습니다. 계절이 트리거가 되는 작품이요.2009년 개봉한 이 영화는 마크 웹 감독이 연출하고 조셉 고든-레빗과 주이 디샤넬이 주연을 맡았습니다. 비선형적 서사 구조, 그러니까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흐르지 않고..
1989년작 《죽은 시인의 사회》는 개봉 35년이 지난 지금도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단 세 글자로 불리는 영화입니다. 처음 봤을 때 저는 그 말을 그냥 낭만적인 구호로 흘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닐의 마지막 무대를 다시 보고 나서야, 그 문장이 얼마나 절박한 외침이었는지 알게 됐습니다. 카르페 디엠, 낭만이 아닌 절박함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에서 나온 라틴어 구절입니다. 여기서 카르페 디엠이란 "현재의 순간을 붙잡으라"는 뜻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내려두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자유롭고 즉흥적인 삶을 예찬하는 구호처럼 알려져 있는데, 저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실제로 그렇게만 받아들였습니다..
남의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키우면서 정작 자신의 아이와는 평생 떨어져 살아야 했다면, 그게 과연 '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영화 《헬프(The Help, 2011)》를 처음 봤을 때 이 질문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10번을 더 봤습니다. 볼 때마다 전혀 다른 지점에서 무너졌습니다. 1960년대 미시시피, 아름다운 화면 속에 숨겨진 것《헬프》의 시대적 배경은 1963년 미국 미시시피 주입니다.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이 여전히 유효하던 시절로, 이 법은 공공시설과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흑인과 백인을 강제로 분리했던 미국 남부의 인종분리 법률 체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같은 버스도 타지 말고, 같은 화장실도 쓰지 말라는 법이었습니다.그런데 직접 겪..
1962년 미국 남부를 여행하는 흑인 피아니스트에게 안전한 숙소와 식당을 알려주는 책이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그 이름이 '그린북(Green Book)'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런 책이 필요했던 시대가 얼마나 최근인지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인종차별의 구조, 장면 하나로 말하다명성과 부를 다 가진 사람도 피부색 하나로 식당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게, 과연 먼 옛날 이야기일까요? 저는 이 질문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영화 속 돈 셜리(Don Shirley)는 카네기홀에서 공연하는 수준의 클래식 피아니스트입니다. 그런데 그가 미국 남부 투어를 떠날 때 반드시 챙겨야 했던 것이 바로 '니그로 모터리스트 그린북(Negro Motorist Green Book)'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린북이란..
픽사(Pixar)가 2015년 공개한 「인사이드 아웃」은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8억 5,700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습니다. 숫자만 봐도 범상치 않은 작품인데, 저는 영화관을 나오면서 '이게 어린이 영화 맞나?' 하고 멍하니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감정 캐릭터 — 머릿속을 해부한 발상의 힘「인사이드 아웃」의 설정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대 심리학의 핵심 개념을 고스란히 녹여낸 구조입니다. 영화는 인간의 뇌 안에 '감정 본부(Headquarters)'라는 공간을 두고, 기쁨·슬픔·버럭·까칠·소심이라는 다섯 감정을 독립된 캐릭터로 구현합니다. 이 설정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 표상(Emotional Representation) 이론과 맞닿아 있습니다. 감정 표상이..
1994년 개봉해 아카데미 6개 부문을 석권한 포레스트 검프를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꺼내 봤습니다. 처음 봤을 때와 전혀 다른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건, 같은 영화를 새로 보게 된다는 뜻인가 봅니다. 줄거리 의미 — 깃털 하나가 말해주는 것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는 깃털 하나가 등장합니다. 바람에 실려 정처 없이 떠다니다 결국 어딘가에 살포시 내려앉는 깃털. 처음 봤을 땐 그냥 감각적인 연출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그게 영화 전체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더군요. 포레스트의 인생 자체가 그 깃털과 닮아 있습니다.포레스트는 IQ 75로, 당시 앨라배마주 공립학교 입학 기준인 80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이 수치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가 어떻게 세상과 다른 방식으..
2017년 개봉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은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스크린에서 실제로 이탈리아 한여름의 열기가 전해지는 것 같아서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 온도가 한참 몸에 남아 있었으니까요. 롱테이크와 원작소설 — 두 매체가 그리는 감정의 온도 차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마지막 롱테이크(long take) 장면입니다. 롱테이크란 편집 없이 카메라를 길게 고정한 채 한 장면을 연속으로 담는 촬영 기법을 말합니다. 올리버의 약혼 소식을 전화로 들은 엘리오가 벽난로 앞에 앉아 불꽃을 바라보다 조용히 무너지는 그 장면 — 컷 없이 티모시 샬라메의 얼굴만 한참 담아냅니다. 저는 그 장면이 흘러가는 내내 숨을..
음악 영화를 보고 나서 플레이리스트를 바꾼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2013년 개봉한 존 카니 감독의 을 본 뒤, 한동안 아침마다 CD 케이스를 한 참 들여다보며 그날의 첫 곡을 신중하게 골랐습니다. 이 영화가 저한테 남긴 건 OST 한 곡이 아니라, '음악을 어떻게 듣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한다는 것의 의미음악 영화라면 보통 공연 장면이나 감동적인 무대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봤을 때,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건 무대가 아니었습니다. 댄(마크 러팔로)과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가 이어폰 한 쌍을 나눠 끼고 밤의 뉴욕 거리를 걸으며 서로의 재생목록을 들려주는 장면이었습니다.그 장면에서 그레타는 이런 말을 건넵니다. "뭘 듣는지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이 영화의 핵심 장치는 레이시텍(Lacuna Inc.)이라는 가상의 기업이 제공하는 기억 삭제 시술입니다. 여기서 기억 삭제란 특정 인물과 관련된 신경 연결망(Neural Pathway)을 선택적으로 소거하는 절차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뇌 속에 저장된 특정 기억의 물리적 흔적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이 설정을 뒷받침하는 방식이 바로 비선형 서사(Non-linear Narrative)입니다. 비선형 서사란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지 않고 기억, 감정, 연상의 흐름을 따라 뒤섞어 전개하는 서술 방식입니다. 찰리 카우프만이 쓴 이 각본은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는데(출처: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제77회 시상식), 그 이유가 바로 이 형식적 실험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