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환호 대신 사이렌 소리를 뒤로하고 어둠 속으로 달아난다면, 그게 과연 승리일까요.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2008)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이 질문을 한참 붙들고 있었습니다. 정의를 지켰는데 이름은 범죄자가 되는 결말. 그 씁쓸함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관람 환경에 따라 체감이 꽤 달라집니다. 놀란 감독이 오프닝 은행 강도 장면과 홍콩 시퀀스 등 여러 장면을 IMAX 필름 카메라로 찍었기 때문입니다. IMAX 상영본에서는 그 구간만 화면 위아래가 확 열리면서 시야를 덮습니다. 저는 재개봉 IMAX 상영관에서 다시 봤는데, 조커가 은행에서 걸어나오는 장면의 압박감이 집에서 볼 때와 비교가 안됐습니다. 화면비율이 바뀌는 순간 관객의 호흡도 같..
유바바와 계약한 자는 자기 이름을 잃고, 이름을 잃은 자는 잃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2001년 개봉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 가진 가장 무서운 전제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판타지 모험담으로만 읽었는데, 다시 보고 나서야 이게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된 이야기인지 깨달았습니다.이름을 빼앗긴다는 것의 의미이 영화의 세계관에는 하나의 핵심 규칙이 있습니다. 유바바가 운영하는 온천 유야에 들어온 자는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자기 이름의 한 글자씩을 빼앗깁니다. 오기노 치히로는 '센'이 되고, 하쿠는 본래 이름을 통째로 잃습니다. 그리고 이 설정이 무서운 이유는 단순히 이름을 못 쓰게 돼서가 아닙니다.이름을 빼앗기면 자기가 누구였는지를 기억하는 능력 자체가 흐려진다는 것, 그게 핵심입니다. 하쿠는 자..
솔직히 저는 레미제라블을 그냥 유명한 뮤지컬 영화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2012년 톰 후퍼 감독 작품이고,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했다는 것도 나중에 찾아봤을 정도예요. 막상 보고 나서야, 이게 단순히 잘 만든 뮤지컬 영화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판틴이 머리를 자르는 장면에서 저는 화면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립싱크 없이 찍은 현장 녹음, 그게 그 눈물의 정체였습니다일반적으로 뮤지컬 영화는 미리 녹음된 음원에 맞춰 배우가 립싱크(lip sync)를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립싱크란 사전 녹음된 음악을 틀어놓고 배우가 입 모양만 맞추는 방식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뮤지컬 영화가 이 방식을 택하는 이유는 음질 안정성과 연기의 완성도를..
처음 만나는 장면인데 왜 눈물이 날까요. 저는 극장에서 타키와 미츠하가 황혼의 산 정상에서 마주서는 그 몇 초를 보면서, 이게 만남인지 재회인지 구분이 안 됐습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2016년 작 《너의 이름은.》은 일본 역대 애니메이션 흥행 2위를 기록한 작품입니다. 근데 저한테 이 영화는 그냥 흥행작이 아니라,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한동안 창밖만 바라보게 만든 영화입니다.황혼의 시간, 처음 만나는데 재회 같았던 이유 이 영화에서 저를 가장 오래 붙잡은 장면은 산 정상의 황혼 시퀀스였습니다. 해가 넘어가는 그 짧은 순간, 3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타키와 미츠하가 실제로 마주 섭니다. 서로의 몸을 빌려 살았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 장면이었는데, 화면이 보랏빛으로 물드는 그 색감이 저는 지..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관에서 이렇게 소리 내서 웃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극한직업은 2019년 개봉 당시 누적 관객 1,626만 명을 기록하며 역대 한국 영화 흥행 2위에 오른 작품입니다. 근데 제가 실제로 보고 나서 느낀 건, 이 영화가 단순히 "웃긴 영화"가 아니라는 거였습니다. 웃음 뒤에 꽤 묵직한 무언가가 깔려 있었거든요.수원왕갈비통닭 장면이 왜 그렇게 웃겼나제가 제일 크게 웃었던 건 무전기 장면이었습니다. 영호가 밖에서 잠복 중에 이무배 일당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다급하게 무전을 치는데, 아무도 받질 않아요. 이유가 뭐냐면, 팀원들이 전부 가게 안에서 닭 튀기느라 무전기를 꺼놨거든요. 전화도 안 받고, 잠복수사 중이라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 겁니다.그 장면에서 극장 전체가 뒤..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볼 때까지 퀸의 음악을 그냥 "아는 노래"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1985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 장면이 시작되고 나서야 자세를 고쳐 앉았어요. 이어폰을 뽑고 스피커로 바꿨고, 저도 모르게 볼륨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뒤인 제가, 필름으로만 남은 공연에서 심장이 뛰고 있었거든요. 라이브 에이드 장면, 모니터 앞에서 소름이 돋았습니다라이브 에이드란 1985년 7월 13일, 아프리카 기아 구호를 위해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과 미국 JFK 스타디움에서 동시에 열린 대규모 자선 공연입니다. 전 세계 약 19억 명이 위성 중계로 지켜봤다고 알려져 있으며(출처: BBC Culture), 퀸의 21분 세트는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로 지금도..
열 살짜리 아이가 우주비행사 헬멧을 벗고 현관을 나서는 장면. 저는 그 몇 초를 보면서 이상하게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영화 〈원더〉는 트리처콜린스 증후군(Treacher Collins Syndrome)을 가진 소년 어기 풀먼이 처음으로 공립학교에 입학하는 이야기인데, 이 영화가 단순히 "장애를 가진 아이가 학교에서 살아남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다 보고 나서 그 판단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첫 등굣길, 헬멧을 벗는다는 것의 무게어기가 늘 쓰고 다니던 우주비행사 헬멧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봤을 때, 그 헬멧이 그 애가 세상과 자기 사이에 세워둔 유일한 벽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그걸 스스로 내려놓고 문을 열고 나가는 열 살짜리를 보면서, 저 ..
하이틴 영화라고 하면 가볍게 넘어가기 쉽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월플라워」(The Perks of Being a Wallflower, 2012)를 보다가 터널 장면 하나에서 멈췄습니다. 샘이 트럭 짐칸 위로 올라가 두 팔을 벌리는 그 순간, 찰리는 차 안에서 부러운 얼굴로 그걸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저는 그 표정이 너무 낯익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딱 저 자리에 있었거든요. 터널 장면이 말하는 것 — 찰리의 성장「월플라워」는 스스로를 벽에 붙은 꽃(wallflower)이라 표현하는 내성적인 고등학생 찰리의 이야기입니다. 월플라워(wallflower)란 파티나 모임에서 구석에 서서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영어 표현으로, 사회적으로 고립된 개인의 심리 상태를 함축합니다. 찰리는 그..
에어컨 바람 속에서 화면 속 이치코가 한여름 장작 스토브 앞에 쪼그리고 앉아 땀을 흘리는 장면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리모컨을 내려놓았습니다. 리틀 포레스트는 한국판과 일본판 모두 '도시를 떠난 귀농'을 다루지만, 두 영화가 풍기는 공기의 온도는 전혀 다릅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 차이를 알고 보느냐 모르고 보느냐에 따라 감상이 꽤 많이 갈렸습니다. 계절의 속도 — 이치코가 빵을 굽는 이유저는 그날 에어컨을 켜놓고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를 봤습니다. 화면 속 이치코는 한여름 땡볕 아래 장작 스토브에 불을 피우고 있었어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땀이 목덜미로 흐르는데도, 반죽을 앉혀놓고 장작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불 온도를 손으로 맞추더군요.솔직히 처음엔 이해가 안 갔습니다. 저 더위에 왜 굳이 불을 피..
1988년 개봉한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은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과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동시에 거머쥔 작품입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영화가 끝나고 꽤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단순한 향수 영화가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뒤로하고 떠나야만 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이 영화는 어떤 판본을 보느냐에 따라 인상이 꽤 달라집니다. 국내에 널리 알려진 건 124분 국제판이고, 감독판은 173분입니다. 감독판에는 성인이 된 토토가 엘레나와 재회하는 긴 대목이 들어있는데, 이 부분이 있고 없고에 따라 알프레도의 선택이 완전히 다르게 읽힙니다. 저는 국제판을 보고 한참 뒤에 감독판을 봤는데, 솔직히 국제판 쪽의 여운이 더 오래 갔습니다. 처음 보신다면 국제판을, 이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