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대사가 유혹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장면을 보고 나서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은수의 표정은 유혹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 심드렁함이 오히려 이 영화 전체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2001년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는 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 언어로 같은 감정을 말하고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온도차: 두 사람은 처음부터 같은 걸 하지 않았다제가 이 장면을 보고 마음에 걸렸던 건 대사 자체가 아니라 온도차였습니다. 은수가 "라면 먹고 갈래요?"를 던지는 순간, 그 말은 아무 무게도 없이 나옵니다. 큰일 아닌 것처럼. 그런데 상우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 있어요. 저는 그 대조를 보면서 이 두 사람이 지금 다른 영화를 찍고 있다..
사랑을 고백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그 질문 앞에서 한동안 멈췄습니다. 두 사람은 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아요. 그런데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새겨지는, 이상한 영화였습니다.작품 정보감독 | 박찬욱출연 | 박해일, 탕웨이개봉 | 2022년러닝타임 | 138분제75회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볼 수 있는 곳 (2026년 9월 15일 확인)티빙 — 구독 시청저는 극장에서 한 번 봤고, 다시 볼 땐 티빙으로 봤습니다.담담하게 보고하는 얼굴이었습니다가장 오래 마음에 걸린 건 해준이 자신은 완전히 붕괴됐다고 말하는 장면이었습니다.서래의 알리바이가 조작이었다는 걸 알게 된 직후, 그가 한 행동이 참 이상해요. 증거가 될 휴대폰을 바다 깊은 곳에 던지라고..
목표를 이루고 나서 오히려 공허해진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이 영화가 정확히 그 감각을 건드립니다.2020년 픽사 애니메이션이고 피트 닥터와 켐프 파워스가 공동 연출했습니다. 러닝타임은 100분이고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았어요. 저는 디즈니플러스에서 봤습니다(2026년 9월 15일 확인). 공연을 마치고 나온 얼굴꿈을 이루면 행복해진다고들 하잖아요. 저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시험만 끝나면, 이것만 되면, 저기만 가면 진짜 삶이 시작될 거라고요. 그런데 막상 그 순간들을 통과해보니 뒤따라오는 건 기쁨보다 허탈에 가까웠습니다.조 가드너도 마찬가지예요. 평생 꿈꾸던 무대에 서고 공연도 완벽하게 해냅니다. 그런데 공연장을 나서는 표정이 묘하게 비어 있어요.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그는 솔직하..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돌아선 적 있으신가요.그 감각을 정확히 담은 영화를 찾다가 노팅힐을 다시 꺼내 봤습니다. 작품 정보원제: Notting Hill감독: 로저 미첼각본: 리처드 커티스출연: 휴 그랜트, 줄리아 로버츠개봉: 1999년러닝타임: 124분볼 수 있는 곳 (2026년 9월 15일 확인)쿠팡플레이 — 구독 시청제공처는 자주 바뀌니 시청 전에 확인해보세요. 하필 이 동네였던 이유노팅힐은 런던 서쪽에 실재하는 동네입니다. 포토벨로 마켓이 있고 색색의 테라스 하우스가 늘어서 있는 곳이죠. 영화는 그 동네의 낡은 여행 서적 전문점을 주 무대로 삼습니다.처음엔 이 설정이 다소 작위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보다 보면 공간 선택이 꽤 계산된 것임을 알게 돼요. 할리우드 스타와 서점 주인..
가족끼리 함께 있는데 오히려 더 외로웠던 적이 있습니다. 다들 각자 무너지고 있는데 아무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는 시간이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그 감각이 떠올랐습니다.2006년 미국 영화고 조나단 데이튼과 발레리 파리스가 공동 연출했습니다. 러닝타임은 101분이에요. 저는 디즈니플러스에서 봤습니다(2026년 9월 15일 확인). 실패한 사람들이 낡은 밴 한 대에 올라타 딸의 미인대회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인데, 웃다가 이상하게 마음이 아픈 영화였습니다.아빠가 무대로 올라가던 순간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클라이맥스인 미인대회 무대입니다.올리브가 할아버지가 짜준 안무를 추기 시작하는 순간 객석이 순식간에 얼어붙어요. 심사위원 표정이 굳고, 진행자가 달려와 아이를 내리라고 하고, 학부모들은 웅성거립니다. ..
지금 사는 시대가 유독 시시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오래된 영화나 음악에 손이 갔는데, 어느 순간 그게 도피인지 취향인지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디 앨런의 2011년작 《미드나잇 인 파리》는 그 질문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과거를 동경하는 것이 낭만인지 회피인지, 이 영화는 웃기면서도 꽤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헤밍웨이가 읽기를 거절한 이유 — 황금시대의 환상이 작동하는 방식파티에서 누군가를 소개받았는데 그게 어니스트 헤밍웨이라면 어떤 표정이 될까요. 주인공 길(오웬 윌슨)이 딱 그 상황을 맞닥뜨립니다. 제가 그 장면을 처음 봤을 때 길의 얼떨떨한 표정이 정확히 제 표정이었습니다. 책으로만 알던 대문호가 눈앞에 서 있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웃기는데, 그 다음 대사에서 소리..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인도 뮤지컬 영화는 다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시간짜리라는 말에 미루고 또 미뤘죠.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는, 마지막 반전 장면에서 "어?" 소리를 입 밖으로 냈습니다. 란초가 누구인지 끝까지 의심하지 않았던 제가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순간이었습니다.반전 구조: 란초의 정체와 이 영화가 숨긴 것파르한과 라주가 5년 만에 란초를 찾아 긴 여정을 떠납니다. 주소를 어렵게 알아내서 도착했더니, 장례식이 열리고 있었죠.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는데 돌아본 얼굴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화면을 멈추고 다시 되감았습니다. 제가 영화 내내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이름이, 사실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받아들이게 됐습니다.일반적으로 인도 상업영화..
11년 동안 서로의 생사조차 몰랐던 세 사람이 아무 약속 없이 같은 공원에 모입니다.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숨을 참았어요. 그런데 다시 보니 이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2007년 미국 영화고 커스틴 셰리든 감독입니다. 프레디 하이모어, 케리 러셀,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로빈 윌리엄스가 나오고 러닝타임은 114분이에요. 저는 극장에서 봤고, 지금은 쿠팡플레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2026년 9월 16일 확인). 대사 한 마디 없이라스트신에 대사가 없습니다. 그 몇 초가 오히려 더 많은 걸 전달해요.어거스트가 무대에 올라 자신이 작곡한 곡을 지휘하기 시작하면 카메라가 관객석으로 넘어갑니다. 라일라가 음악에 이끌려 걸어 들어오고, 반대편에서 루이스가 걸어 들어와요. 두 사람 다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2004년 영화를 다시 보면서 이게 단순한 전쟁 스펙터클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영웅들의 이름은 모두 남았는데, 정작 전쟁이 끝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거든요.작품 정보원제 | Troy감독 | 볼프강 페테르젠원작 | 호메로스 『일리아스』출연 | 브래드 피트, 에릭 바나, 올랜도 블룸, 다이앤 크루거개봉 | 2004년볼 수 있는 곳 (2026년 9월 9일 확인)넷플릭스 — 구독 시청저는 처음에 극장에서 봤고, 다시 볼 땐 유튜브에서 구매해서 봤습니다. 지금은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네요.하필 그 밤이었습니다다시 돌려보다가 멈추게 된 장면이 있습니다. 브리세이스와 아킬레스가 밤을 함께 보내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요. 전장에서만 살아온 남자가 처음으로 죽음 이후를 궁금해하지 않는 얼굴을 하는 순간이..
감동적인 뮤지컬이 실존 인물의 행적을 얼마나 미화해도 괜찮을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한 장면에 온몸이 굳었고, 그 감동이 가라앉고 나서야 불편한 질문이 남았습니다.2017년 미국 영화고 마이클 그레이시 감독입니다. 휴 잭맨, 잭 에프론, 젠데이아가 나오고 러닝타임은 105분이에요. 저는 개봉 당시 극장에서 봤고, 최근에 디즈니플러스로 다시 봤습니다(2026년 9월 15일 확인).문을 밀고 나오는 순간몸이 먼저 반응했던 건 This Is Me 장면이었습니다.바넘이 상류층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단원들에게 뒤에 숨어 있으라고 하는 장면이요. 레티가 문 뒤에 조용히 서 있다가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합니다.그런데 계단을 한 칸씩 내려올수록 소리가 커져요. 뒤에서 단원들이 하나둘 따라 나오고요. ..